오늘도 한강변에는 사람들이 달린다. 새벽 여섯 시,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시간부터 러닝화와 바탁의 마찰 소리가 들린다. 처음에는 그저 평범한 조깅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무리를 지어 달리는 사람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러닝크루’라고 부른다. 이름도 세련되다. 달리기 동호회라고 하면 왠지 올드한 느낌이 들 테니, 영어로 바꾼 것인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단순히 건강을 위해 뭉친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들의 모습에서 다른 무언가가 보였다. 달리기는 어쩌면 부차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러닝크루에 모인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재미있다. 진지하게 운동을 하러 온 사람도 있지만, 새로운 인연을 찾아온 사람도 있다. 운동 후의 뒤풀이를 더 기대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에게 달리기는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된 것이다. 실제로 SNL 코리아의 한 코너는 이런 현상을 재치 있게 포착했다. 스케치 코미디로 만든 것이지만, 픽션이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 된 셈이다.
하지만 이것을 비난할 일일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의 모든 행위에는 겉으로 드러난 것 이상의 의미가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배가 고파서 밥을 먹지만,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 밥을 먹기도 한다. 사람을 만나기 위해 밥을 먹기도 한다.
달리기도 마찬가지다. 건강해지기 위해 달리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동기일 뿐이다. 그 위에 다양한 층위의 욕망이 덧입혀진다. 새로운 인연을 만들고 싶은 마음, 소속감을 느끼고 싶은 마음, 혹은 그저 외로움을 달래고 싶은 마음까지.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이 현상이 코로나19 이후 더욱 두드러졌다는 점이다. 팬데믹은 우리에게서 많은 것을 앗아갔다. 직접적인 만남의 기회는 줄어들었고, 스크린 속 이미지로만 소통하는 일이 늘어났다. 러닝크루의 인기는 어쩌면 이에 대한 반작용일지도 모른다.
달리기에는 특별한 점이 있다. 달리는 동안 우리는 가면을 쓸 수 없다. 땀에 번진 화장, 거친 숨소리, 흐트러진 머리카락. 이런 것들이 우리의 민낯이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취약함이 신뢰를 만든다. 함께 달리는 동안 우리는 서로의 약점을 본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인다. 완벽하지 않은 모습으로도 괜찮다는 안도감. 어쩌면 우리는 이것을 찾아 달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얼마 전 한강변에서 본 광경이 떠오른다. 한 러닝크루가 달리기를 마치고 둥글게 모여 앉아있었다. 모두 땀에 젖은 채였다. 피곤해 보였지만,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들의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우리는 왜 달리는가? 그 답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우리는 무언가를 찾아 달린다. 그것이 건강이든, 사랑이든, 혹은 그저 속 시원한 대화일지라도. 달리는 동안 우리는 조금씩 그것에 가까워진다. 서로에게, 그리고 우리가 찾는 것에.
달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찾아 달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때로는 목적지를 정확히 알지 못한 채로. 그래도 괜찮다. 달리는 동안 우리는 조금씩 변화하고 있으니까.
그들이 정말로 찾는 것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달린다는 사실 그 자체다. 완벽하지 않은 모습으로, 때로는 서툴게, 하지만 끊임없이 달린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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