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봄과 가을, 마라톤의 황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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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목표와 방식으로 길을 나선다. 누군가에게는 아침 조깅 5km가 하루의 활력소이고, 다른 이에게는 주말 트레일 러닝이 일상의 탈출구다. 10km, 하프 마라톤, 그리고 풀 코스 마라톤까지 – 거리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달리며 발견하는 자신만의 리듬과 의미다. 42.195km의 마라톤도 결국은 개인의 선택과 도전일 뿐, 그 자체로 더 우월하거나 특별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런 다양한 달리기 경험 중에서 마라톤은 종종 시작과 끝 사이에 희열과 절망, 포기의 유혹과 극복의 순간이 압축된 여정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이 드라마틱한 사건은 계절을 가린다. 모든 계절이 마라톤에 적합하지는 않다. 특히 봄과 가을, 이 두 계절은 마라톤의 황금기라 불린다. 왜일까? 단순히 날씨가 좋아서? 아니다. 인간의 생리학적 특성, 도시의 문화적 리듬, 그리고 자연의 미학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마라톤 러너들이 ‘최적의 기온’이라 부르는 10~15℃. 이 수치는 그저 숫자가 아니라 인간 신체의 최적 작동 온도다. 놀랍게도 이 온도는 봄과 가을에 집중되어 있다. 여름의 무더위는 체온 조절 능력을 한계로 몰아붙인다. 30도가 넘는 온도에서 마라톤을 뛰는 건 마치 엔진이 과열된 자동차로 사막을 횡단하는 것과 다름없다. 반면 겨울의 혹한은 근육을 경직시켜 부상의 위험을 높인다. 영하의 온도에서 달리는 건 오일이 얼어붙은 기계를 가동하는 것과 비슷하다. “체온 조절은 마라톤의 핵심 과제입니다.” 한 스포츠 의학 전문가의 말이다. “서늘한 온도에서는 체내 열 발산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져 심장이 열 발산보다 근육에 더 많은 혈액을 공급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봄과 가을은 인간의 몸이 최고의 퍼포먼스를 발휘할 수 있도록 최적화된 자연의 선물인 셈이다.

이런 이유로 세계 기록의 상당수는 가을 대회인 베를린 마라톤과 시카고 마라톤에서 탄생한다.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가을의 선선한 바람은 러너의 몸을 최적화하고, 더불어 그들의 정신까지 가볍게 한다. 마라톤에서는 몸만큼이나 마음의 상태도 중요하다. 가을의 청명한 하늘과 선선한 바람은 러너들에게 “오늘은 네 날이다”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연중 마라톤 일정표를 펼쳐보면 봄과 가을에 메이저 대회가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기후적 요인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인간의 생활 리듬, 문화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봄에는 보스턴 마라톤(4월), 런던 마라톤(4월)이 열린다. 가을에는 베를린 마라톤(9월), 시카고 마라톤(10월), 뉴욕 시티 마라톤(11월)이 대표적이다. 이들 대회는 단순한 레이스가 아니라 도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축제다. 보스턴 마라톤은 1897년부터 시작된 세계 최고(最古) 마라톤으로, 매년 애국절(Patriots’ Day)에 열린다. 이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기준 기록을 통과해야 한다. 마치 명문대학에 입학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만큼 보스턴 마라톤의 완주 메달은 러너들에게 하나의 학위증과도 같은 존재다.

뉴욕 시티 마라톤의 경우는 어떨까? 100만 명 이상의 관중이 응원하며 도시 전체가 들썩인다. 세계 각국에서 모인 5만여 명의 러너들은 5개 자치구를 관통하며 뉴욕의 다채로운 모습을 경험한다. 맨해튼의 고층 빌딩 숲, 브루클린의 힙스터 문화, 퀸즈의 다문화적 분위기, 브롱크스의 열정, 스태튼 아일랜드의 여유로움까지. 뉴욕 시티 마라톤은 그 자체로 뉴욕이라는 도시의 축소판이다. 단순한 레이스가 아닌 문화적 사건인 셈이다.

마라톤은 또한 도시의 속도로부터의 일시적 탈출이다. 현대인들은 매일매일 정신없이 달린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달리기가 아니다. 마라톤에서 러너들은 오직 자신의 호흡과 발걸음에만 집중한다. 이 탈출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자연이 선사하는 특별한 경관과 만날 때다. 가을 단풍과 마라톤의 만남은 ‘춘천 마라톤’에서 정점을 이룬다. ‘가을의 전설’이라 불리는 이 대회는 의암호 주변의 형형색색 단풍 사이를 달리는 경험을 선사한다. 자연의 아름다움이 고통의 순간을 잠시 잊게 해주는 마법 같은 순간이다. 러너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고통은 잠시지만, 메달과 사진은 영원하다.” 춘천 마라톤의 단풍 터널을 지나는 순간의 사진은 그 어떤 메달보다 값진 보상이 된다.

봄에는 또 다른 매력이 기다린다. 벚꽃이 만개한 도쿄 마라톤이 대표적이다. 도쿄의 번화가를 지나 벚꽃이 흩날리는 공원을 관통하는 코스는 마치 일본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 같다. 현대 도시의 풍경과 전통적 자연미가 어우러진 코스를 달리는 경험은 단순한 운동을 초월한 문화적 체험으로 확장된다. 벚꽃잎이 날리는 가운데 달리는 순간, 러너들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짓는다.

대한민국의 3대 메이저 마라톤 대회 역시 봄과 가을에 집중되어 있다. 마치 계절의 법칙을 따르듯이 말이다. 이들은 각각의 독특한 매력으로 러너들을 유혹한다. 봄의 서울 국제 마라톤(동아 마라톤)은 국내 유일의 세계육상연맹(WA) 플래티넘 라벨 인증 대회다. 이 인증은 마라톤 대회의 미슐랭 스타와도 같은 존재다. 광화문에서 잠실종합운동장까지 이어지는 도심 코스는 도시의 역동적 에너지를 온몸으로 느끼게 한다. 서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한 번에 관통하는 이 코스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서울의 역사를 경험하는 것과 같다.

가을의 춘천 마라톤은 미국 육상협회가 선정한 세계 8대 마라톤 중 하나다. 국제적 명성을 자랑하는 이 대회는 의암호 주변의 단풍 터널을 통과하는 코스로 유명하다. 러너들은 이 구간을 ‘천국의 계단’이라고 부른다. 물론 실제로는 오르막이라 체력적으로는 지옥에 가깝지만, 시각적으로는 천국 같은 아름다움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이 아이러니한 상황이야말로 마라톤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고통과 아름다움, 도전과 성취가 공존하는 이 경험은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가장 극적으로 경험하게 한다.

JTBC 서울 마라톤은 가을의 한강변을 달리는 경험을 선사한다.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출발해 잠실종합운동장까지 이어지는 코스는 서울의 다양한 풍경을 한눈에 담아낸다. 한강은 서울의 젖줄이자 도시의 허파다. 이 한강을 따라 달리는 경험은 마치 서울의 동맥을 따라 도시의 심장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과도 같다. 가을의 선선한 바람이 한강의 물결과 어우러질 때, 러너들은 자신이 도시와 하나가 되는 듯한 묘한 일체감을 경험한다.

마라톤은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다. 인간과 자연, 도시와 계절이 만나는 복합적 예술이다. 그중에서도 봄과 가을은 이 예술이 가장 완벽하게 구현되는 시간이다. 특히 마라톤의 마지막 7km, 이른바 ‘벽’을 만나는 순간에 계절의 힘은 더욱 중요해진다. 35km 지점에서 갑자기 찾아오는 극도의 피로감, 일명 ‘벽(The Wall)’은 모든 마라토너의 악몽이다. 이 순간 봄과 가을의 선선한 바람은 작은 위로가 된다. 마치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속삭이는 듯한 바람의 손길이 러너의 등을 가볍게 민다.

러너들은 알고 있다. 만약 당신이 한 번의 마라톤을 통해 최상의 경험을 원한다면, 봄과 가을을 선택하라고. 그것은 단순한 기록의 문제가 아니다. 경험의 질, 기억의 깊이에 관한 문제다. 마라톤에서 메달은 하나의 상징일 뿐, 진정한 보상은 그 과정에서 얻는 경험과 깨달음이다. 봄의 새싹과 가을의 단풍은 그 경험을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 계절이 러너에게 건네는 작은 선물인 셈이다.

봄과 가을, 마라톤의 황금기는 오늘도 전 세계 러너들을 유혹하고 있다. 달력을 보며 다음 대회를 계획하는 러너들의 눈빛에는 언제나 설렘이 가득하다. 그것은 마치 첫사랑을 기다리는 설렘과도 비슷하다. 그들은 알고 있다. 봄과 가을, 그 특별한 시간이 다시 찾아올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때 그들은 다시 출발선에 서서, 자신만의 42.195km를 향한 여정을 시작할 것이다. 그것이 마라톤의 마법이고, 봄과 가을이 간직한 러너들만의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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