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주가 가르쳐준 러너의 ‘불완전한 회복’

한때 42.195km를 2시간 7분 20초에 주파했던 다리가 제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러너라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악몽이다. 23일 방송된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 이봉주는 2020년 방송 촬영 중 “배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막 뛰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그때 그가 느꼈을 공포를 우리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근육긴장이상증. 중추신경계 이상으로 근육이 굳거나 몸이 뒤틀리는 질환이다. 목이 90도로 꺾이고, 허리가 계속 숙여지며, 복부는 경련과 수축을 반복했다. 평생을 자신의 몸과 교감하며 달려온 러너에게 이보다 잔혹한 운명은 없을 것이다.
의학의 한계 앞에 선 마라토너
19개월간 대학병원과 한의원을 전전했다. 신경차단술, 보톡스 시술까지 받았지만 상태는 더욱 악화됐다. 의사들도 원인을 몰라 약물 처방만 반복할 뿐이었다. 목이 조여와 음식 삼키기와 호흡마저 힘들어졌고, 24시간 잠을 이룰 수 없는 지옥 같은 나날이 계속됐다.
“이런 병이 왜 나한테 왔을까, 너무 답답했다”는 유퀴즈에서의 그의 고백에는 모든 러너들의 공포가 담겨있다. 달리기를 정체성으로 살아온 사람에게 움직일 수 없다는 현실은 존재 자체의 부정이었을 것이다.
그때 아내 김미순씨가 던진 한 마디가 모든 걸 바꿨다. “스스로 방법을 찾자.”
러너의 아내가 된 치료사
김미순씨의 2년 반간 간병은 단순한 헌신을 넘어선 전문적 치료 과정이었다. 러닝 커뮤니티에서 흔히 듣는 ‘운동생리학’과 ‘회복 과학’의 실전 적용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체계적인 영양 관리: 소화와 삼키기 힘든 상태를 고려해 모든 음식을 갈아서 제공했다. 제철 식재료 중심의 항염 식단으로 몸의 염증 반응을 줄이는 데 집중했다. 이는 현재 엘리트 러너들이 부상 회복 시 적용하는 영양학적 접근법과 정확히 일치한다.
일일 마사지 요법: 매일 오일을 “박스째” 사서 전신 마사지를 시행했다. 특히 배와 목 부위를 중심으로 한 지속적인 마사지로 근육을 부드럽게 하고 혈액순환을 개선했다. 엘리트 운동선수들이 받는 전문 마사지와 동일한 수준의 케어였다.
수면 최적화: 잠에 좋은 채소와 식품을 찾아 먹이고, 몸을 따뜻하게 유지하도록 했다. 캐모마일차 등을 통해 교감신경의 항진 상태를 완화하고 부교감신경을 활성화시키는 접근법을 사용했다. 이는 오늘날 수면 과학에서 강조하는 핵심 원리들이다.
점진적 회복의 과학
회복 과정은 러너들이 부상에서 돌아올 때와 놀랍도록 유사했다. 수면 시간이 20분에서 시작해 23분, 25분, 30분으로 점진적으로 늘어나는 과정을 기록했다. 마치 부상 후 러닝을 재개할 때 거리를 조금씩 늘려가는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조금씩 몸이 좋아지니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유퀴즈에서의 그의 말은 모든 러너들이 공감할 수 있는 본능적 반응이다. 몸이 회복되면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싶어지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짜 러너의 DNA다.
150미터가 보여준 러닝의 새로운 정의
2023년 삼척 황영조 국제마라톤대회. 4년 만에 이봉주가 다시 러닝화를 신었다. 그가 뛴 거리는 고작 150미터. 한때 세계 무대에서 42.195km를 달렸던 그에게는 찰나와 같은 거리였다.
하지만 그 150미터는 러닝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했다. 기록도, 순위도, 메달도 없었다. 오직 ‘달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완벽한 의미를 가졌다. 관중들의 박수는 그의 속도가 아닌 존재 자체에 대한 찬사였다.
더욱 감동적인 건 아들과의 3.8km 동반주였다. “42.195km 완주보다 더 감동적이었다”는 아내의 말이 모든 걸 설명해준다. 때로는 개인기록보다 함께 달리는 것이, 빠른 속도보다 꾸준한 지속이 더 큰 의미를 갖는다는 러닝의 진짜 가치를 보여줬다.
러닝 커뮤니티가 배워야 할 것들
이봉주의 이야기는 러닝 커뮤니티에 여러 교훈을 준다.
회복의 새로운 패러다임: 부상이나 번아웃에서 돌아올 때 ‘예전 수준으로의 완전한 복귀’만이 성공이 아니다. 현재 몸 상태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최선을 찾는 것도 충분히 의미 있는 회복이다.
지지체계의 중요성: 아무리 강한 개인이라도 혼자서는 극복할 수 없는 시련이 있다. 김미순씨 같은 조력자의 존재는 전문 의료진 못지않은 치료 효과를 발휘한다. 러닝크루나 가족의 지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사례다.
달리기의 진정한 의미: 속도나 거리, 기록이 전부가 아니다. 30분이라도 뛰고 싶다던 이봉주의 소원처럼, 달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다. 우리는 종종 이 근본적 기쁨을 잊고 산다.
과학적 접근의 필요성: 김미순씨의 치료법은 감정에만 의존한 것이 아니라 영양학, 운동생리학, 수면과학의 원리를 적용한 체계적 접근이었다. 러너들도 부상 예방과 회복에 있어 더욱 과학적이고 전문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러너로서 살아간다는 것
“평생을 잘해야겠다”고 유퀴즈에서 아내에게 말하는 이봉주의 모습에서 우리는 진짜 러너의 자세를 본다. 감사할 줄 아는 마음, 함께하는 기쁨, 그리고 무엇보다 달릴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겸손함.
1996년 애틀랜타에서 보여준 의지력이 개인의 한계 돌파였다면, 2024년 그가 보여주는 것은 공동체와 함께하는 지속가능한 러닝이다. 42.195km를 혼자 완주하는 것보다 150미터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달리는 것이 때로는 더 큰 승리다.
현재 이봉주는 조금씩 뛰기도 하고, 산에도 가고, 아들과 함께 달리기도 한다. 완벽하지 않지만 행복해 보인다. 그리고 그 모습이야말로 우리 모든 러너들이 추구해야 할 진짜 목표가 아닐까.
러닝화 끈을 묶을 때마다 기억하자. 오늘 우리가 달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그리고 함께 달려줄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선물인지를.
이봉주가 가르쳐준 것은 이것이다: 진짜 러너는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넘어져도 다시 러닝화를 신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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