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일 광화문광장 앞, 이른 새벽부터 형형색색 운동복을 입은 인파가 모여들었다. 이날 그들이 모인 이유는 단 하나, ‘달리기’였다. 비록 아침부터 내리는 가랑비가 봄날의 따스함을 앗아갔지만, 4만여 명의 마라토너들의 열정만큼은 식을 줄 몰랐다.
“서울마라톤은 로또다.”
한 참가자의 말이다. 지난해 참가 신청은 풀코스와 10km 코스가 각각 16분, 45분 만에 마감되었다. 마치 인기 아이돌 콘서트 티켓팅을 연상케 하는 경쟁률이다. 그만큼 ‘달리기’라는 행위가 현대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게 되었는지 보여주는 풍경이기도 하다.
서울시와 대한육상연맹, 동아일보, 스포츠동아가 공동 주최하는 2025 서울마라톤 겸 제95회 동아마라톤은 5년 연속 세계육상연맹(WA) 최고 등급인 ‘플래티넘 라벨’을 획득한 국내 유일의 대회다. 더불어 아시아 최초로 세계육상문화유산(헤리티지 플라크)에 등재되어 보스턴, 베를린, 아테네마라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적인 대회로 성장했다.
마라톤이라는 종목은 원래 외로운 싸움이다. 그러나 이날 광화문에서 출발해 동대문, 청계천, 한강을 거쳐 잠실종합운동장까지 이어지는 42.195km 코스 위에서는 아무도 혼자가 아니었다. 66개국에서 모인 4만여 명의 참가자들은 ‘함께’ 달렸다.
“이번 대회는 국내 마라톤 대회 역사상 최초로 4만여 명의 마라토너가 서울 도심을 달리는 사상 초유의 이벤트입니다.”
대회 조직위원회 관계자의 설명이다. 1999년 국내 단일 종목 이벤트 사상 최초로 참가자 1만 명을 돌파한 이래, 2005년과 2017년에 각각 2만, 3만 명을 넘어섰고, 올해는 마침내 4만 명 고지를 넘어선 것이다.
주목할 만한 변화는 참가자 구성이다. 10년 전만 해도 풀코스에 도전한 30대 참가자는 전체의 12.8%에 불과했으나, 올해는 36.6%로 대폭 증가했다. 여성 참가자 비율도 10.7%에서 18.4%로 늘었고, 10km 코스에서는 무려 41.4%에 달했다. MZ세대의 ‘러닝 열풍’이 이제는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았음을 보여주는 수치다.
글로벌 대회로서의 면모도 뚜렷해졌다. 전 세계 65개국에서 온 외국인 3766명이 한국의 수도 서울을 누볐다. 국가별로는 중국(856명), 홍콩(553명), 일본(468명), 대만(424명) 순으로 많았다. 서배스천 코 WA 회장은 “1931년부터 시작된 서울마라톤 겸 동아마라톤은 한국 마라톤을 대표하는 상징적 대회이자 세계적으로 역사가 깊은 레이스 중 하나”라며 “한국 마라톤 최고 기록 28개 중 10개가 이 대회에서 수립됐다”고 전했다.

“비가 오니까 춥긴 하지만, 달리기에는 오히려 좋은 날씨 아닌가요?”
출발 지점에서 만난 한 20대 여성 참가자는 긴장과 설렘이 뒤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이처럼 새로운 도전을 향한 열망은 참가자들의 얼굴에서 쉽게 읽을 수 있었다.
마스터스 마라토너들에게는 특별한 ‘런저니 레이스’도 서울마라톤부터 시작된다. 이는 동아일보가 주최하는 3대 마라톤 대회(서울마라톤, 공주백제마라톤, 경주국제마라톤)에 모두 참가하는 ‘마라톤 여행’으로, 세 대회를 모두 완주한 참가자에게는 대회별 완주 메달 외에 ‘런저니 메달’을 추가로 수여한다.
한편, 이날 대회에서는 김홍록(한국전력)이 2시간12분29초로 남자 국내부 2연패를 달성했다. 지난해 자신의 기록을 2분 가까이 단축한 성과지만, 그의 표정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좋은 기록으로 우승해 기분은 좋지만, 목표했던 것만큼 기록이 나온 건 아니다. 하반기에 2시간9분대 기록에 도전하겠다.” 더 높은 목표를 향해 달리겠다는 마라토너의 의지가 엿보였다.
여자 국내부에서는 임예진(청주시청)이 2시간30분14초로 김도연(삼성전자)을 4초 차이로 제치고 우승했다. 국제부에서는 에티오피아와 케냐 선수들이 강세를 보이며 각각 상위권을 차지했다.
오세훈 서울시장도 이날 행사에 참여해 참가자들을 응원했다. 그는 “러너스테이션, 핏스테이션을 비롯해 시민들이 더 많이 달리고 걸을 수 있는 서울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일상 속에서 건강을 관리할 수 있는 여러 제도와 정책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1931년 출범한 서울마라톤은 이제 단순한 스포츠 행사를 넘어 하나의 도시 축제로 자리잡았다. 공원과 한강변에서 조깅하는 이들의 모습이 늘어난 것처럼, ‘달리기’는 이제 현대인의 일상 속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마라톤 붐이 일시적 유행이 아닌, 도시민들의 삶의 방식으로 정착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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