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세대가 바꾸고 있는 러닝화 시장의 지형도
흔들리는 거인들” 또는 “새로운 강자의 등장
조용히, 하지만 강력하게 러닝화 시장의 판도가 변하고 있다. 2030세대가 몰고 온 변화의 바람은 한때 아성을 이루던 거대 브랜드들의 자리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선택한 새로운 주자는 과연 누구일까. 그리고 그 선택의 기준은 무엇일까.
달리기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운동이다. 우리의 조상들은 생존을 위해 달렸고, 현대인들은 건강을 위해 달린다. 하지만 최근 20-30대에게 달리기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이들에게 달리기는 하나의 문화이자 자기표현의 수단이 되었다. ‘펀러닝(fun running)’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만큼, 달리기는 이제 즐거움과 동의어가 되었다.
패션업계에 따르면 이러한 변화를 반영하듯 국내 운동화 시장은 4조 원에 달하며, 그중 러닝화 시장은 1조 원을 넘어섰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시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지각변동이다. 한때 이 영역을 장악했던 나이키와 아디다스의 독보적인 위치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새로운 브랜드들이 젊은 러너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프랑스의 ‘호카’, 스위스의 ‘온 러닝’, 미국의 ‘브룩스’. 낯선 이름들이지만 이제는 러닝화 시장의 새로운 강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들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일상성’에 있다. 과거의 러닝화가 고기능성만을 강조했다면, 이들은 일상생활에서도 편하게 신을 수 있는 디자인을 선보였다.
온 러닝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특유의 아웃솔에 구멍이 뽕뽕 들어간 디자인은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이제는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다. 유명 셀럽들이 데일리룩에 온 러닝을 매치하기 시작하면서, 이 신발은 단순한 운동화를 넘어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다. 심지어 품절 사태까지 빚었다.
호카도 마찬가지다. 두꺼운 밑창이라는 독특한 특징으로 러닝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으며 급격히 성장했다. 단순히 달리기 편한 신발이 아니라, 신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주는 신발을 만든 것이다. 이는 마치 애플이 단순한 전화기가 아닌 라이프스타일을 판매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러한 성과는 숫자로도 입증된다. 호카는 지난해 14억 1,300만 달러의 매출을 기록하며 전년 대비 58.5%의 성장을 이뤄냈다. 온 러닝 역시 46.6%의 놀라운 성장세를 보였다. 반면 나이키는 핵심 시장인 북미에서 5.8%의 매출 감소를 겪었다. 시장의 변화는 이미 시작됐고, 그 속도는 생각보다 빠르다.
국내 시장의 변화도 주목할 만하다. 한때 배우 고현정의 신발로 유명했던 아식스는 최근 놀라운 변신을 보여주고 있다. 기능성으로는 이미 인정받고 있었지만, 일상에서 신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웠던 디자인을 개선한 것이다. 그 결과 아식스의 지난 1분기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80% 늘었으며, 매출도 14% 증가했다.
뉴발란스의 사례는 더욱 극적이다. 지난달 출시한 중·장거리 러닝화 ‘퓨어셀 SC 트레이너 v3’는 하루 만에 완판을 기록했다. 이를 구매하기 위해 약 500명이 ‘오픈런’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러닝화에 대한 젊은 세대의 열광적인 관심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현상을 단순한 패션 트렌드의 변화로만 볼 수는 없다. 이는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다. 젊은이들은 더 이상 운동과 일상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달리기는 특별한 순간이 아닌, 일상의 한 부분이 되었다. 운동복과 평상복의 경계도 모호해졌다. 이른바 ‘애슬레저’ 룩의 유행이 이를 잘 보여준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브랜드를 선택하는 기준이다. 과거에는 브랜드의 인지도나 광고 모델이 중요했다면, 이제는 자신의 라이프스타일과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가 더 중요해졌다. 나이키나 아디다스와 같은 전통적인 스포츠 브랜드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도 이러한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기업들은 이러한 변화에 발맞추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대기업은 물론 소규모 브랜드까지 ‘펀러닝족’의 수요를 겨냥한 마케팅을 전개하고 있다. 러닝화를 시즌 주력 상품으로 내세우는 것은 이제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다. 이는 러닝 열풍을 반영해 러닝화를 킬러 콘텐츠로 육성하겠다는 기업들의 의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선택권은 소비자에게 있다. 아무리 화려한 마케팅을 펼치더라도, 결국 그것을 받아들이고 선택하는 것은 소비자들이다. 그리고 지금 2030세대는 자신들만의 새로운 기준으로 러닝화를 선택하고 있다. 그들은 달린다.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자신들만의 속도로.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만의 신발을 신는다.
이들이 그리는 새로운 지도는 러닝화 시장을 넘어, 우리 사회 전반의 변화를 예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거대 기업의 독점적 지위가 흔들리고,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는 브랜드들이 부상하는 현상은 비단 러닝화 시장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이러한 변화는 아직 진행 중이다. 어떤 브랜드가 최후의 승자가 될지, 혹은 승자 없는 공존의 시대가 올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소비자들이 더 이상 과거의 방식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이제 자신만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신발을 찾고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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