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은 수많은 층이 쌓여서 높고, 바다는 깊다. 그리고 인간의 발은 그 두 경계를 이어가는 땅을 디딘다. 서윤복의 발은 흙에 찍힌 그 자국을 통해 우리에게 길을 남겼다. 마라톤이란 그런 것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길 위에서 인간의 의지가 자신의 한계와 싸우는 외로운 전쟁이다.
1947년 4월 19일, 보스턴 마라톤의 결승선. 서윤복은 2시간 25분 39초의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 일장기가 아닌 태극기를 달고 세운 첫 세계 신기록이었다. 광복 후 달리기 시작한 그의 발이 세계를 밟은 것이다. 다리는 인간의 무게와 역사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고 있었다. 그날 보스턴의 하늘은 맑았을 것이다. 그러나 서윤복의 마음 속에는 식민지의 기억과 해방의 환희가 뒤섞인 복잡한 날씨가 있었을 것이다.
서윤복은 손기정의 제자였다. 손기정은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장기를 달고 뛰었다. 그것은 달리는 자의 슬픔이었다. 승리의 순간에도 자기 나라의 깃발을 가슴에 달지 못한 슬픔이었다. 그 슬픔을 알았기에 손기정은 제자에게 태극기를 달게 했다. 스승은 제자의 몸에 태극기를 달아주면서 자신의 한을 덜었을 것이다. 그리고 남승룡은 페이스메이커가 되어 서윤복의 발을 이끌었다. 세 사람의 발이 하나로 이어져 거둔 승리였다. 그들은 각자의 시간을 살았지만, 역사의 한 지점에서 그 시간이 합쳐졌다.
보스턴으로 가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미군 군정으로부터 대회 소식을 듣고, 그들의 도움으로 여비를 마련했다. 군용기를 타고 대회를 일주일 앞두고 도착한 그는 풀코스를 단 두 번 뛰어본 선수였다. 준비는 부족했다. 그러나 그의 몸에는 식민지 시대를 견뎌온 한국인의 인내가 새겨져 있었다. 그 인내가 그를 결승선으로 이끌었다.
우승 후에는 배를 타고 돌아왔다. 오랜 항해 끝에 인천항으로 돌아온 영웅에게 김구는 ‘족패천하(足覇天下)’라는 네 글자를 내렸다. 발로 천하를 제패했다. 백범의 글씨는 6.25의 불길 속에 사라졌지만, 그 의미는 숭문고 교정에 서 있는 비석에 남아 있다. 전쟁은 많은 것을 앗아갔지만, 서윤복은 보스턴 마라톤의 브로치형 메달만은 끝까지 지켰다. 메달 두 개에 담긴 의미를 그는 알았다. 그것은 단순한 금속이 아니라, 해방된 조국의 상징이었다.
그는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는 페이스 난조로 27위에 그쳤다.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다. 모든 날이 보스턴의 날은 아니다. 그는 1949년, 긴 달음을 멈추고 은퇴했다. 은퇴는 또 다른 시작이었다. 1960년까지 숭문중학교 육상 감독을 맡아 후배들을 키웠다. 올림픽과 아시안 게임에서도 남자 육상부 감독을 맡았다. 그의 지식과 경험은 다음 세대로 이어졌다.
그는 오래 달렸으나 영원히 달릴 수는 없었다. 노년에 알츠하이머가 그를 찾아왔다. 병은 그의 기억을 조금씩 앗아갔지만, 그는 끝까지 자신의 기개를 잃지 않았다. 모든 기사를 스크랩해 두고, 사소한 것들은 잊었어도 보스턴 마라톤에서의 일화는 상세히 기억했다. 그러나 강연을 거절했다. “실수할까 두려워서”라고 했다. 그것은 달리는 자의 자존심이었다. 최선을 다할 수 없다면 아예 하지 않는 것이 그의 철학이었다.
생활은 어려웠다. 그러나 그는 불평하지 않았다. 달리는 자는 고통을 견디는 법을 안다. 마라톤은 인내의 경기다. 그는 끝내 2017년 6월 27일, 인생이라는 마라톤의 결승선을 통과했다. 그의 죽음 이후 2년이 지나서야 국가는 그를 국립서울현충원 제3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손기정에 이어 육상 선수로는 두 번째였다. 서울 현충원에 안장된 최초의 체육인이 되었다.
마침내 그의 이름이 도로에 새겨졌다. 2024년 10월, 이대역과 대흥역 사이 1.2킬로미터 언덕길, ‘서윤복길’이 되었다. 그의 모교 숭문고가 그 길 위에 있다. 이대녹지 쉼터는 ‘서윤복 쉼터’로 이름이 바뀌었다. 달리는 자에게도 쉼이 필요하다. 땀을 흘리고 난 뒤의 쉼은 달콤하다. 그가 달렸던 그 길을 이제 후배들이 따라 달린다. 발자국은 그렇게 이어진다.
4월 19일 서울 마포에서 서윤복 마라톤 대회가 열렸다. 상암 월드컵공원 평화광장에서 출발하는 레이스는 그의 승리 78년 만에 열리는 첫 기념대회다. 손기정, 남승룡에 이어 ‘1947 보스턴 3인방’의 기념 마라톤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그들은 각자의 시대를 뛰었지만, 그 발자국은 하나의 길을 만들었다.
영화 ‘1947 보스턴’이 그의 이야기를 다시 세상에 알렸다. 이야기는 그렇게 전해진다. 입에서 입으로, 필름에서 필름으로. 그러나 영화보다 더 생생한 것은 달리는 사람들의 숨소리다. 마포 서윤복 마라톤에 참가하는 이들의 숨소리는 77년 전 보스턴의 서윤복의 숨소리와 겹친다.
달리는 사람은 목적지를 향하지만, 그 길의 끝은 또 다른 시작이다. 보스턴의 승리가 그렇듯, 서윤복의 기억도 그렇게 쉼 없이 달린다. 영웅은 죽지만 영웅의 이야기는 남는다. 이제 우리가 그 달음을 잇는다. 서윤복이 달렸던 땅을 우리도 달린다. 그것이 역사의 계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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