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리기라는 건 참 이상한 일이다. 현대인들은 왜 굳이 돈을 내고 42.195km를 달리려 하는 걸까. 그것도 4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하지만 마라톤이란 스포츠는 그 자체로 도시의 역사다. 도시가 숨 쉬고, 피를 돌리고, 땀을 흘리는 방식이다. 서울마라톤(서울국제마라톤 겸 동아마라톤)의 역사는 그런 의미에서 서울이라는 도시가 현대화되는 과정의 기록이기도 하다.
1931년, 동아일보가 주최한 첫 마라톤 대회가 열렸다. ‘기록은 중요하지 않다. 도전 정신이 중요하다.’ 시대정신을 담은 이 모토는,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했다. 첫 대회는 23.2km 코스로 진행됐고, 김은배 선수가 1시간 25분 5초로 우승을 차지했다. 지금의 42.195km와는 거리가 달랐지만, 그 의미만큼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당시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마라톤은 단순한 스포츠 이상의 의미였다. 일제강점기, 달리는 것은 하나의 저항이었고, 민족의 긍지를 지키는 방법이었다. 발걸음 하나하나에 억눌린 민족의 열망이 담겼다. 손기정, 남승룡과 같은 선수들은 그렇게 성장했다. 그들의 달리기는 개인의 영광을 넘어 민족의 자부심이 됐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손기정 선수의 금메달은 역사가 됐다. 일장기를 달고 뛰어야 했던 비극적 현실 속에서도, 그의 우승은 희망이었다. 동아일보가 그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린 일은 단순한 저항이 아닌, 시대의 상징이 됐다. 신문은 정간됐지만, 마라톤은 계속됐다. 그들은 달렸고, 그 발걸음은 역사가 됐다.
해방 이후, 서울마라톤은 한국 육상의 산실이 됐다. 서윤복은 1947년 보스턴마라톤에서 우승했다. 식민지에서 갓 벗어난 나라의 선수가 세계 최고 권위의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한 것은 새로운 시대의 신호탄이었다. 1950년대와 60년대를 거치며, 이 대회는 한국 마라톤의 든든한 기둥이 됐다.
한국전쟁으로 잠시 멈춰섰던 대회는 1954년, 전쟁의 상흔이 채 아물기도 전에 다시 시작됐다. 폐허가 된 도시에서 달리는 것은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달리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명이었고, 재건의 의지였다. 도시가 재건되는 동안, 마라톤 선수들은 희망을 전했다. 그들의 달리기는 전후 재건의 상징이었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질주였다.
1970년대와 80년대는 한국 마라톤의 부흥기였다. 황영조, 이봉주와 같은 선수들이 이 대회를 통해 성장했다. 그들은 국제무대에서 메달을 따며 한국 마라톤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1981년, 대회는 ‘서울 국제마라톤’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아시아 최초로 국제육상연맹(IAAF)의 공인을 받았다는 것은, 이 대회가 세운 기록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는 의미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은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올림픽 마라톤 코스가 동아마라톤과 유사한 코스를 채택하면서, 서울은 세계적인 마라톤 도시로 발돋움했다. 도시는 더 커졌고, 마라톤 코스도 변했다. 아스팔트는 더 넓어졌고, 빌딩은 더 높아졌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은 이 대회가 가진 상징성이었다.
1990년대 이후, 서울마라톤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더 이상 엘리트 선수들만의 대회가 아닌, 시민 마라토너들의 축제로 변모했다. 직장인들이 퇴근 후 한강변을 달리기 시작했고, 주말이면 공원은 러너들로 가득 찼다. 마라톤은 일상이 됐다. 그리고 서울마라톤은 그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
2000년대 들어 대회는 더욱 진화했다. 광화문에서 출발해 잠실 주경기장까지 이어지는 코스는 단순한 달리기 길이 아니었다. 서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관통하는 시간의 길이었다. 경복궁을 지나고, 종로를 달리고, 청계천 옆을 지날 때마다 러너들은 자신도 모르게 역사의 일부가 됐다. 심지어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도 비대면 온라인 레이스로 명맥을 이어갔다. 위기 속에서도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2025년, 95회를 맞는 서울마라톤은 더 이상 단순한 국내 대회가 아니다. 세계육상연맹(WA)의 플래티넘 라벨을 5년 연속으로 받은 국제적인 대회다. 보스턴, 아테네 마라톤과 함께 세계육상문화유산으로 선정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95년의 역사가 만든 무게감이다. 4만 명의 러너들이 참가하고, 그중 5천 명은 해외에서 온다. 서울은 이제 명실상부한 세계적인 마라톤 도시가 됐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이 길은 단순한 아스팔트가 아니다. 근대화의 아픔과 성장의 역사, 그리고 미래를 향한 희망이 켜켜이 쌓인 시간의 길이다. 참가자들은 각자의 이유로 달린다. 누군가는 기록을 위해, 누군가는 건강을 위해, 또 누군가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전문 선수들은 더 빠른 기록을 위해 달리고, 취미 러너들은 완주의 기쁨을 위해 달린다.
하지만 그들이 함께 만드는 것은 도시의 새로운 역사다. 광화문에서 잠실까지, 42.195km의 거리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그것은 서울이라는 도시가 호흡하는 방식이고, 시민들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여정이며, 한국 마라톤이 걸어온 긴 여정의 또 다른 이정표다.
2025년 3월 16일, 서울의 심장부가 다시 한번 뛰기 시작할 것이다. 4만 개의 발걸음이 만드는 리듬은 도시의 새로운 심장박동이 될 것이다. 1931년부터 이어져 온 이 달리기의 전통은, 이제 글로벌 시대의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가고 있다.
달리는 것은 결국 살아있다는 증명이니까. 서울마라톤은 그렇게 도시의 생명력을 95년간 증명해왔다. 식민지 시대의 저항에서 시작해,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서는 희망이 됐고, 경제 성장의 상징이 됐으며, 이제는 세계적인 도시 축제가 됐다. 95년의 시간 동안, 이 대회는 한 도시의 성장과 한 민족의 극복, 그리고 수많은 개인의 승리를 목격해왔다.
그리고 2025년,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될 것이다. 광화문을 출발하는 첫 발걸음부터 마지막 결승선까지, 우리는 다시 한번 마라톤이 가진 특별한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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