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 일찍 일어났다. 5시 알람이 울렸을 때는 창문 밖이 아직 캄캄했다. 마라톤 대회가 열리는 날이다. 42.195km를 뛰어야 한다. 그 숫자를 머릿속으로 되뇌면 뇌가 작게 비명을 지른다. 내 발로 그 거리를 이동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서울에서 수원까지 거의 다 가는 거리다. 하지만 나는 이미 참가비를 냈고, 배번을 받았으며, 칩이 부착된 운동화를 신고 있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집을 나서자 찬 공기가 얼굴을 때린다. 3월의 이른 아침은 생각보다 차갑다. 출발 지점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형형색색의 운동복을 입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몸을 풀고 있었다. 어떤 이는 가볍게 제자리 뛰기를 하고, 어떤 이는 다리를 쭉 펴고 앉아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이미 수십 번의 마라톤을 뛴 베테랑처럼 보였고, 또 다른 일부는 나처럼 긴장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출발 5분 전입니다. 참가자 여러분은 출발선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마이크를 통해 들려오는 안내방송에 나는 천천히 출발선으로 향했다. 내 앞과 뒤로 끝없이 이어지는 사람들. 우리는 모두 같은, 혹은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이곳에 모였다. 마라톤을 완주하기 위해. 어쩌면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기 위해. 혹은 단순히 무언가를 성취했다는 기쁨을 맛보기 위해.
“10, 9, 8…”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자 내 심장은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아직 한 발짝도 뛰지 않았는데 이미 심장이 빠르게 뛴다는 것은 어쩌면 좋지 않은 신호일지도 모른다.
“3, 2, 1, 출발!”
총성과 함께 인파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 몇 킬로미터는 의외로 쉬웠다. 넓은 도로를 수천 명의 사람들과 함께 달리는 것은 묘한 쾌감을 준다.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거대한 인간 강을 이루고 있는 느낌. 관중들의 응원 소리와 음악 소리가 어우러져 축제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시계를 확인하니 페이스가 좋았다. 킬로미터당 약 4분 45초. 목표 페이스였던 시간당 13km, 즉 3시간 20분 대 완주를 위한 속도였다.
5km 지점에서 첫 번째 급수대를 만났다. 자원봉사자들이 종이컵에 물을 담아 달리는 사람들에게 건넸다. 나는 달리면서 물을 마시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을 얼굴에 쏟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달리다 보면 어차피 땀으로 흠뻑 젖을 테니까.
10km 지점까지는 여전히 기분이 좋았다. 마치 내가 진짜 달리기 선수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15km를 지나면서부터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다리가 무거워지고, 숨이 가빠졌다. 처음에는 쉽게 넘겼던 오르막길이 이제는 에베레스트처럼 느껴졌다.
“지금 15km를 뛰었어. 아직 27km가 남았어.”
그 생각을 하자 갑자기 모든 것이 압도적으로 느껴졌다. 앞으로 뛰어야 할 거리는 내가 지금까지 뛴 거리의 거의 두 배였다. 하지만 이미 내 다리는 납덩이처럼 무거워져 있었다. 처음의 가벼움과 자신감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이제는 한 발자국을 내딛는 것조차 의지의 문제가 되었다.
20km 지점에서 나는 잠시 걷기 시작했다. 수치스러웠다. 주변의 다른 참가자들은 여전히 달리고 있었고, 나만 걷고 있다는 사실이 내게는 일종의 패배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잠시 후 옆에서 똑같이 걷고 있는 중년 남성을 발견했다. 그는 내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 속에는 ‘괜찮아, 나도 힘들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이것이 나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모두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뛰기 시작했다. 속도는 더 느려졌지만,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21km 지점, 하프 마라톤을 완주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였다. 아직 절반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나를 짓눌렀다.
25km를 지날 때쯤 나는 소위 ‘벽’이라는 것을 경험했다. 마라토너들 사이에서 유명한 그 ‘벽’.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은 극도의 피로감과 무력감. 다리는 이제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고, 숨은 턱 끝까지 차올랐다. 이때 내 머릿속에서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교차했다.
“그냥 포기할까? 누가 알겠어? 그냥 코스를 이탈해서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가버리면 돼.” “아니야, 여기까지 왔는데. 3개월 동안 준비했잖아.” “하지만 너무 힘들어. 이건 인간이 할 일이 아니야.” “그래도 해볼래. 걷더라도 완주는 하겠어.”
결국 나는 걷기와 달리기를 번갈아 하며 30km 지점까지 왔다. 이제 12km가 남았다. 12km는 평소의 내게는 가벼운 러닝 거리다. 하지만 이미 30km를 달린 후의 12km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35km 지점에서 나는 갑자기 오른쪽 종아리에 통증을 느꼈다. 경련이었다. 잠시 멈춰 서서 근육을 마사지했지만, 통증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때 옆에서 달리던 한 여성이 내게 작은 소금 봉지를 건넸다.
“혀 밑에 조금 넣어보세요. 도움이 될 거예요.”
다시 천천히 걷기 시작했고, 이내 느린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거리는 7km. 그리고 그 7km가 내 인생에서 가장 길게 느껴지는 거리가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
40km 지점. 이제 단 2km만 더 가면 된다. 하지만 내 몸은 이미 한계를 넘어선 지 오래였다. 발바닥은 화상을 입은 것처럼 아팠고, 양쪽 무릎은 마치 누군가가 망치로 내려친 것처럼 욱신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이제는 달리는 것도, 걷는 것도 아닌, 그저 앞으로 몸을 던지는 것에 가까웠다.
그리고 마침내, 저 멀리 결승선이 보였다. 파란색 아치와 그 위에 쓰여진 ‘FINISH’라는 글자. 그 순간 내 안에서 마지막 남은 에너지가 솟아올랐다. 다리의 통증, 폐의 화끈거림, 심장의 고통, 모든 것을 잊고 나는 마지막 힘을 다해 달렸다. 중간에 잠깐 걷기도 했지만, 평균 시속 13km의 페이스를 꽤 잘 유지했던 것 같다.
결승선을 통과하는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잠시 멈춘 것 같았다.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흐르는 듯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귓가를 가득 채웠다. 누군가 내 목에 메달을 걸어주었고, 다른 누군가는 내게 물병을 건넸다.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다리는 떨리고, 숨은 가빴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평온했다. 시계를 보니 3시간 20분대. 목표했던 시간 안에 완주했다. 42.195km. 내 인생에서 가장 긴 여정을 마친 후의 평온함.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왜 마라톤을 하냐고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이는 건강을 위해서, 어떤 이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또 어떤 이는 단순히 즐거움을 위해서라고 말한다.
나의 대답은 이렇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결승선을 통과했을 때의 그 기분, 그 순간만큼은 알 것 같아요.”
마라톤은 단순한 달리기 경기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과의 싸움이고, 인내와 의지의 시험이며, 또한 인간 정신의 한계를 시험하는 여정이다. 그리고 그 여정의 끝에서 우리는 자신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된다.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어떤 고통을 견딜 수 있는지,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42.195km. 그 숫자는 이제 내게 단순한 거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하나의 우주다. 내가 건너온,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건널 나만의 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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