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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만 개의 발걸음, 하나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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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하의 날씨, 그것도 체감온도 영하 6도의 매서운 추위 속에서 4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

23일 15개국에서 모인 158명의 엘리트 선수들과 40개국에서 온 4만 명의 일반인들. 그들은 모두 ‘2025 대구마라톤대회’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이곳에 모였다. 세계 최고 수준의 상금이 걸린 이 대회는 이제 더 이상 단순한 지역 행사가 아니었다.

탄자니아의 게브리엘 제럴드 게이는 2시간 5분 20초라는 대회 신기록으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그의 뒤를 단 2초 차이로 쫓던 에티오피아의 ‘마라톤 영재’ 아디수 고베나는 아쉽게 2위에 머물렀다. 이들의 기록은 모두 2024 파리올림픽의 신기록을 갈아치웠다.

도시는 이날 하나의 거대한 순환로가 되었다. 청라언덕, 서문시장, 수성못을 지나는 코스는 마치 대구의 역사와 현재를 관통하는 하나의 타임라인 같았다. 과거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던 거리를 지나는 달림이들의 발걸음에는 백 년 전 시민들의 숨결이 겹쳐 보였다. 도시의 시간은 이렇게 중첩되어 흐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DAEGU’라고 적힌 붉은색 티셔츠들이 만들어내는 물결은 마치 도시의 피부를 흐르는 혈류 같았다. 그들은 각자의 이야기를 안고 달렸다.

학교 점퍼를 맞춰 입고 나온 경북대 학생들, 만화 캐릭터로 분장한 ‘갱갱수월런’ 달리기 크루의 모습은 마라톤이라는 개인 스포츠가 어떻게 집단적 축제로 승화되는지를 보여주었다.

코스 곳곳에서 울리는 풍물패의 장단, 자원봉사자들이 건네는 따뜻한 음료수, 시민들의 응원 소리는 도시의 체온을 높였다. 추위는 달리는 이들의 열정 앞에서 무력했다. 오히려 그 차가운 공기는 달리는 이들의 숨결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었고, 그들이 내뱉는 하얀 입김은 마치 도시 전체를 덮는 안개처럼 퍼져나갔다.

여자부 우승자 메세레 베레토 토라는 “감정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기쁘다”고 했다. 그녀의 말에서 우리는 언어의 한계를 만난다. 극한의 신체적 도전 끝에 도달하는 그 기쁨은, 어쩌면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역에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회가 끝난 뒤, 자원봉사자들이 묵묵히 거리를 청소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도시가 숨 쉬는 방식이구나. 4만 명의 발걸음이 만든 흔적을 지우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과정. 그것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호흡과도 같았다. 빈 병과 비닐봉지들이 사라지고 깨끗해진 거리를 보며, 나는 축제와 일상 사이의 미묘한 균형에 대해 생각했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내년에는 이 대회를 3월로 옮기고 우승 상금도 20만 달러로 올리겠다고 했다. 세계 6대 마라톤 대회로의 도약을 꿈꾸는 이 도시의 야망이 어디까지 닿을지, 나는 자못 기대가 된다. 더구나 육현표 대한육상연맹 회장이 언급한 ‘플래티넘 대회 승격’ 가능성은 이 도시의 미래에 대한 또 다른 암시처럼 들린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한 도시가 세계적인 스포츠 도시로 변모해가는 과정을 목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도시와 인간, 개인과 집단, 일상과 축제가 만들어내는 미묘한 교차점을 발견하게 된다. 마라톤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도전이, 어떻게 도시 전체의 서사가 되어가는지를 목격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대회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진짜 이야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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