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노래를 들으며 마라톤을 떠올리는 것은 이상한 일일까. 정인과 윤종신의 ‘오르막길’을 들으면 42.195km를 달리던 순간들을 떠올린다. 노래는 분명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부르는 가사 하나하나가 마라톤의 순간들과 겹쳐졌다.
처음 마라톤을 시작했을 때, 나는 그저 완주하는 것만을 목표로 삼았다. 그때는 몰랐다. 마라톤이 내게 어떤 의미가 될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사랑과 닮아있는지를. 지금 생각해보면, 마라톤과 사랑은 우리가 선택하는 가장 아름답고도 고통스러운 도전이 아닐까 싶다.
“이제부터 웃음기 사라질 거야 가파른 이 길을 좀 봐.” 마라톤 코스에서 첫 오르막을 만났을 때의 느낌이 정확히 그랬다. 평지를 달리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저 멀리 보이는 언덕의 실루엣. 그때부터 웃음기가 사라진다는 것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처음의 설렘과 기쁨이 서서히 사라지고, 현실이라는 오르막과 마주하는 순간이 온다.
마라톤 러너들은 안다. 코스는 결코 평탄하지 않다는 것을. 때로는 완만한 오르막이, 때로는 가파른 급경사가 기다린다. 우리는 그것을 ‘월드컵 고개’, ‘대공원 언덕’처럼 특정한 이름으로 부른다. 그 이름들은 마치 연인들이 겪는 시련의 순간들처럼 구체적이고 선명하다. 첫 싸움, 첫 오해, 첫 실망. 그 모든 순간들이 우리의 오르막이 된다.
“끈적이는 땀, 거칠게 내쉬는 숨이 우리 유일한 대화일지 몰라.” 이 구절을 들을 때마다 나는 마라톤 중반, 숨이 턱까지 차오르던 그 순간을 떠올린다. 러닝메이트와 나눌 수 있는 대화라고는 거친 숨소리뿐이었다. 그때의 땀은 정말 끈적였다. 달리기를 하다 보면 땀의 질감도 시간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초반의 땀은 맑고 시원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땀은 끈적이고 짜다. 마치 연인과의 대화처럼. 처음에는 모든 것이 새롭고 설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대화는 무거워지고 때로는 숨이 막힌다.
가만 생각해보면 사랑과 마라톤은 정말 닮았다. 둘 다 시작할 때는 설렘으로 가득하다. 모든 것이 새롭고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이 드러난다. 처음의 들뜸은 가라앉고, 숨이 가빠지기 시작한다. 그때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우리는 그제서야 깨닫는다. 이것이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마라톤이라는 것을.
마라톤 훈련을 하다 보면 특별한 순간들을 만난다. ‘러너스 하이’라고 부르는 그 순간. 모든 것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듯한 느낌. 다리는 저절로 움직이고, 호흡은 자연스럽게 흐르고, 마음은 고요해진다. 사랑에도 그런 순간이 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것 같은,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을 것 같은 순간. 하지만 그 순간은 오래 가지 않는다. 곧 다음 오르막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평온했던 길처럼 계속 나를 바라봐줘.” 이 간절한 부탁은 마라톤 러너들의 기도이기도 하다. 다리는 이미 천근만근이지만, 그래도 처음처럼만 달릴 수 있기를. 시작할 때의 그 가벼움을 잃지 않기를. 하지만 우리는 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오르막길은 우리를 변화시킨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결코 예전의 그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다.
마라톤에서 가장 힘든 구간은 32km 지점이라고 한다. ‘벽’이라고 부르는 그 지점에서 많은 러너들이 포기를 생각한다. 다리는 납처럼 무겁고, 숨은 턱까지 차오른다. 남은 거리는 고작 10km. 하지만 그 10km가 이전의 32km보다 더 길게 느껴진다. 사랑에도 그런 순간이 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해 보이는 순간, 이대로 포기하고 싶은 순간. 하지만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은 안다. 그 순간을 견디고 나면 새로운 풍경이 기다린다는 것을.
완주 지점이 가까워질 때의 느낌은 특별하다. 그때는 이상하게도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고통은 여전하지만, 그 고통이 달라진다. 괴로움이 아닌 성취감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가끔 바람이 불 때만 저 먼 풍경을 바라봐 올라온 만큼 아름다운 우리 길.” 이 구절은 마라톤 완주 후의 감정을 정확히 설명한다. 고통스러웠던 순간들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바뀌는 것. 그것이 마라톤이고, 그것이 사랑이다.
나는 지금까지 세 번의 마라톤을 완주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되었다. 첫 번째 마라톤에서는 자신의 한계를 만났고, 두 번째에서는 그 한계를 넘어서는 법을 배웠다. 세 번째 마라톤에서는 비로소 달리는 것 자체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사랑도 그렇지 않을까. 한 번의 사랑으로 우리는 상처받는 법을 배우고, 다음 사랑에서는 그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어쩌면 언젠가는, 사랑하는 것 자체를 즐길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노래는 끝나지만, 우리의 오르막길은 계속된다. 달리는 사람들은 안다. 사랑하는 사람들도 안다. 진정한 의미는 정상이 아니라 오르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조금씩 달라진다는 것을. 어쩌면 그것이 오르막길의 진짜 목적인지도 모른다. 우리를 성장시키고, 변화시키고,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
달리기를 시작한 지 몇 년이 지났다. 이제는 노래를 들을 때마다 묻게 된다. 당신은 지금 어떤 오르막길을 오르고 있나요? 그리고 그 길에서 만난 당신은 어떻게 달라지고 있나요? 우리는 모두 각자의 오르막길을 오르고 있다. 때로는 헐떡이며, 때로는 웃으며.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조금씩, 하지만 확실히 변해가고 있다.
이제 나는 안다. 사랑 노래를 들으며 마라톤을 떠올리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어쩌면 그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둘 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오르막길이니까. 그리고 그 길에서 우리는 진정한 자신을 만나게 되니까.
댓글 쓰기
댓글을 달기 위해서는 로그인해야합니다.